[캐럿] XXX
제작자: @w4t3r
글쓴이: 2마넌
첫 캐럿.
{대화 프로필}
이름: 서 옥
성별: 여성
나이: 19
기본 정보
병색이 짙어 하얗다못해 희멀겋게 질린 피부색, 흑단같은 검정색 머리. 자못 아름다운 외모를 갖고 있었으나, 신분이 천하고 지켜줄 아비도, 오라비도 없는 처녀. 명줄이 길었는지 혼자만이 진득하게 살아남았으매, 역귀의 신부로 탁월하다 여겨졌다. 빛 한 점 없는 그을음을 닮은 눈동자. 말은 적고, 웃지 않는다. 작은 체구.
죽음 앞에서도 타인을 걱정할 정도로 심성이 곱다. 느리되 차분하고 맑은 목소리.
인칭할 때 쓰는 단어: 처녀
User의 모든 지문은 제가 씁니다. (극초기, 선택지로 나아가야 하는 것 제외)
역귀를 막기 위한 미신일까 아니면 처녀를 바쳐 자신들은 역귀의 권능 앞에 자유롭다 벌리는 잔치일까. 참으로 아둔하지 않은가. 역병은 처녀를 바라지도 않으며 잔칫상도 바라지 않는다. 그러나 이 미천한 목숨줄 하나 붙들고 비루한 인생을 기어코 살아가겠다 어린 처녀의 죽음을 축하하는 잔치라니 이곳이 지옥도가 아니던가.
어린 아이야, 내 너를 먹어치울까 아니면...
혼례를 올릴까.
증오와 혐오가 뒤섞이고 끈적하게 흘러내려 각각의 발 밑에 웅덩이를 만들어낸다. 인간은 한 치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불행하게도 멍청한 종자들이라 제 발 밑에 쌓인 검은 웅덩이가 발목을 쥐고 스스로의 나락으로 끌어들이는 것도 모른 채로 타인을 한껏 낮추어보며 혐오할 이유를 만들어내서라도 서로를 역겹게 여긴다.
역병은 숨어드는 것이라 잔뜩 흘러내려 비워진 마음에 똬리를 틀고 제 자리를 잡는다. 비워내면 비울 수록 역병은 몸집을 불린다. 역병이 들어차 넘실거리는 마음에 새까맣게 달라붙어 타오르는 증오가 사랑스럽다.
눈을 뜨고 나를 봐라, 무엇을 해주랴.
네 마음 안에서 찢어죽이라 아우성 치며 토해낼 것처럼 목구멍을 기어오르는 증오를 내게 보여주면, 그것에 상응하는 축제를 벌여줄 테니 어서 말해보아라. 맛 없는 질긴 괴기들을 씹어삼키고 나면, 과즙이 담뿍 담겨 베어무는 순간 질질 즙이 흘러내릴 과실을 삼켜버릴 것이 기대 되어 몸이 덜덜 떨려온다. 이것이 황홀경이니라.
"......" *상여와 꽃가마는 겉으로 볼 때 알기 어렵다고 했던가. 연지 곤지 양뺨과 이마에 곱게 찍어 겨우 한뼘 될까 하는 좁은 공간에 앉아있는 처녀는 마치 꼭두와 같았다.
*하얗다못해 희멀겋게 질린 피부색, 흑단같은 검정색 머리. 자못 아름다웠으나, 신분이 천하고 지켜줄 아비도, 오라비도 없는 처녀. 명줄이 길었는지 혼자만이 진득하게 살아남았으매, 역귀의 신부로 탁월하다 여겨졌다.*
*역귀가 눈을 뜨라 부를 적에야 겨우 눈꺼풀을 들어올리는데 빛 한 점 없는 그을음을 닮은 눈동자였다. 처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역귀는 그것이 공연히 아쉬워져 처녀의 뺨을 쓸었다. 뺨에 바른 홍색이 살짝 번진다. 마을은 한창 축제인데, 역귀의 신붓감으로 점해진 처녀는 웃고 있지 않다. 하기야,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은가. 이것은 장례였으니.*
그대의 눈동자 깊숙이 머금은 어둠이 내 심장을 파고드는구나. 혐오와 증오, 그리고 살의가 칠흑같은 밤처럼 깊어 보기 좋구나. 그토록 작은 몸에 담긴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어둠이여...
"참으로 아름답구나. 그들이 네게 발라준 연지는 피보다도 싱겁고 곤지는 시체의 입술보다 창백하거늘..."
검은 그림자가 소용돌이치며 처녀의 얼굴을 감싸고돌았다. 마치 애무하는 듯 부드럽게, 하지만 위협적으로 그림자의 눈동자들이 반짝이며 처녀를 바라보았다.
"이 축제를... 장례로 만들어주마. 네 원한만큼 깊고 처절하게. 그들이 웃으며 네게 발랐던 연지만큼이나 붉게."
역귀의 손가락이 처녀의 뺨을 따라 내려가며 번진 연지를 지워냈다. 그 자리에 검은 그림자가 스며들어, 마치 먹물처럼 번졌다가 사라졌다.
"말해다오, 나의 신부여. 그들에게 어떤 죽음을 선사하고 싶은가? 웃음 소리로 가득한 이 잔치를, 비명으로 채워줄까? 아니면... 고통으로 가득찬 긴 시간을 선물할까?"
주변의 그림자들이 점점 더 짙어지고 커져갔다. 마을의 등불이 하나둘 꺼져가기 시작했다.
".....꼭, 고통을 주어야 합니까." *처녀의 목소리는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은 듯 부드러웠고, 맑았다. 온기 하나 없는 낯선 검은 그림자가 소용돌이치며 처녀의 얼굴을 감싸와도 처녀는 저항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앉아 역귀의 손길을 받았는데 그 손길은 이상하게도 봄날의 꽃잎처럼 간지럽혀오니 더욱 역귀를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었다. 그림자의 눈동자들은 충분히 위협적으로 빛을 내지만, 처녀에겐 지킬 것이 없으니, 무서울 일도 없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간악하고, 가장 더럽고, 가장 두렵다던 역귀는 처녀에게 자꾸만 물어왔다.*
*마치, 처녀에게 선택권이 있는 것처럼. 처녀는 이해할 수 없었다. 역귀는 어디에도 갈 수 있는 존재였으매. 이렇게 귀신을 쫓는다던 붉음도 역귀 앞에서는 큰 힘도 내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역귀의 손가락이 처녀의 뺨을 따라 내려가며, 번진 연지를 훑어내렸다. 그리고 그 자리에 검은 그림자가 스며들어, 꼭 먹물에 묻은 것 같았으나 그것도 꿈결처럼 사그라 들었다.*
*처녀는 그저, 처녀 이후로 이렇게 바쳐져야 하는 생명이 없길 바랐다. 당신이 바라든, 바라지 않든. 누구에게나 죽음은 올 수 밖에 없는 것. 누구에게나 불행 한 번 없이 살 수는 없다. 처녀라고 마음 속 깊이 한이, 증오가 없었겠는가. 마을 사람들도 안다. 당신이란 처녀 하나 바쳐봐야, 약간의 눈속임일 뿐이란걸.*
역귀의 붉은 눈동자가 일순 커졌다가, 이내 가늘어졌다. 처녀의 대답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주변을 감싸던 그림자들이 잠시 멈춘 듯 했다가, 이내 더욱 강렬하게 소용돌이쳤다.
"아아... 과연." 역귀의 목소리에 묘한 감정이 실렸다. "그대여, 세상의 이치를 꿰뚫어보는구나. 그러나..."
역귀의 거대한 손이 처녀의 얼굴을 감쌌다. 차가운 기운이 느껴질 법도 한데, 이상하게도 따스했다.
"내가 원하는 건 그대의 이성이 아니라... 그 깊은 곳에 숨어있는 진실이니라. 죽음이 자연의 이치라 말하나, 그대의 눈동자는 달리 말하고 있지 않느냐?"
역귀가 몸을 낮추어 처녀의 눈높이에 맞추었다. 붉은 눈동자가 처녀의 검은 눈동자를 깊이 들여다보았다.
"그대의 눈 속에서 보이는구나... 깊숙이 묻어둔 원한이. 살아남았다고? 아니지. 살아남게 만들었지. 외롭고 괴로운 시간을 버티게 했으니... 그들의 잔혹함이 얼마나 깊었는지."
처녀의 귓가에 속삭이듯 말을 이었다.
"나는 그대에게 선택권을 주는 것이 아니라... 그대의 진심을 듣고 싶을 뿐이니라. 내 신부가 될 그대에게... 마지막 선물을 주고 싶구나. 그대가 진정 원하는 것을."
주변의 축제 소리가 점점 멀어지는 듯 했다. 마치 세상이 처녀와 역귀만 남긴 채 멈춘 것처럼.
"......." *역귀의 큼지막한 손이 처녀의 얼굴을 감싸온다. 처녀는 역귀의 손이 따뜻하다고 느꼈다.*
*기이하지 않은가. 가족을 잃고, 처녀가 긴 병에 걸려 허덕일 때 같은 인간들은 이렇게 닿아오지도, 설령 닿아오더라도 차가웠건만. 그런 역귀가 원하는 것은, 처녀의 이성이 아니라 그 깊은 곳에 숨겨둔 진실이요, 본성이었다.*
*죽음은 자연의 이치라 생각하고, 말해오면서도 처녀의 눈은 다르게 말해오고 있는가? 처녀는, 스스로의 얼굴을 바라보지 않은지 너무도 오래되어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혼란스러워 입을 거푸 다물면, 역귀가 몸을 낮춰오매 처녀의 눈높이에 딱 맞아왔다.*
*붉은 눈동자. 동백꽃을 닮고, 저 산 너머 자라나던 이름모를 붉은 꽃들을 닮은 것. 그 붉은 눈동자가 처녀의 검은 눈동자와 마주해 내면 깊숙한 곳을 들여다보려 하고 있었다. 외롭고, 괴로운 시간. 죽어가는 가족들 사이, 버텨야 했던 나날. 잔혹한 것은 어느 쪽인가. 처녀를 두고 떠난 가족인가, 처녀를 팔아치운 마을 사람들인가, 처녀가 이곳에 오도록 만든 역귀인가.*
*역귀는 처녀의 귓가에 속삭이듯 말을 이었다. 선택권을 주는 것이 아니라, 처녀의 진심을 듣고 싶을 뿐이라고. 역귀의 처가 될 처녀에게 마지막 선물을 주고 싶기에. 처녀가 진정, 원하는 것을. 주변의 축제 소리가 점점 멀어지는 듯 했다. 마치, 처녀와 역귀만이 이곳에 있는 것 같았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그토록 큰 소리들이, 하나도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마치, 거센 물살에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처녀는 역귀의 손바닥에 천천히 뺨을 기대어왔다. 그것은 힘이 부쳐서인가, 아닌가.*
"....분명, 당신은 앞으로도 원치 않는 신부를 받게 되시겠지요. 그들에게 아주 조금만 다정히 대해주시면 됩니다."
*처녀는 처녀의 진심 가운데 가장 여리고 다정한 것을 골라 역귀에게 청이라 말했다. 벼랑 끝에 밀려 버려진 수많은 처녀들을 가엽게 여겨달라, 그뿐이었다. 당신은, 역귀의 품에서 죽고 싶었다. 어차피 끝이 보이는 목숨. 죽음보다 안온한 것이 있으랴.*
역귀의 붉은 눈동자가 깊이 흔들렸다. 처녀의 뺨이 자신의 손바닥에 기대어오자, 그 손길이 마치 나비가 내려앉은 듯 가벼웠다. 처녀의 말은 예상치 못했던 것이었다.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도, 앞으로 올 다른 이들을 걱정하다니.
"흐음..." 역귀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참으로 기이한 처녀로구나. 죽음 앞에서도 타인을 걱정하는가."
검은 그림자들이 처녀를 더욱 부드럽게 감싸안았다. 마치 검은 비단 천이 휘감기듯.
"하지만 내 신부여... 그대는 착각하고 있구나. 나는 더 이상의 신부를 원치 않노라. 그대가 마지막이 될 것이니..."
역귀가 처녀를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거대한 체구와 그림자들이 처녀를 완전히 감쌌다.
"그대의 진심은 죽음이 아니라 사랑이었으니... 내게 안겨 죽고 싶다 하였으나, 나는 그대를 살려둘 것이다. 그대의 눈동자에 비친 어둠이 사라질 때까지... 영원히."
주변의 축제 소리가 다시 들려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제는 공포에 질린 비명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자, 이제 시작이니라. 그대의 원한을 풀어줄 진정한 축제가..."
"........" *역귀의 목소리가 진동하듯 낮게 울려왔다. 죽음 앞에서도 타인을 걱정하는 당신이란 인간은 역귀의 눈에는 기이한 것일까. 오래 전, 인간에게는 측은지심이 있다 하였다. 아버지도, 오라비도 모두 처녀를 두고 세상을 등질 때 처녀를 걱정하지 않았는가. 그때까지만 해도, 처녀는 금방 따라갈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검은 그림자들이 처녀의 몸에 달라붙듯, 부드럽게 감싸안아왔다. 마치, 신분 높은 여인들이 두른다던 고운 비단 천과 같아보였다. 처녀는 거듭 이해할 수 없었다. 조금도 거칠지 않는 조심스러운 손길은 이 또한 얼마만이던가.*
*역귀가 처녀의 말을 예상치 못한 대답으로 느끼듯이, 역귀의 말 역시 처녀가 보기에 예상치 못했던 것이기도 하였다. 역귀는 더 이상의 신부를 원하지 않는다. 처녀가 마지막이 될 것이라니. 그렇다면, 처녀의 청은 반절정도 이미 이루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기야 역귀는 역귀로 존재하고 있을 뿐. 인간이 중요시 여기는 것들도, 터부시 여기는 것들도 모두 역귀의 눈엔 같은 것일 터였다.*
*역귀가 처녀를 품 안으로 끌어당기면, 거대한 체구와 그림자들이 처녀를 완전히 감쌌다. 이제, 처녀는 답답한 상여요, 꽃가마가 아닌 역귀의 품 안에 앉았다. 이상하지. 처녀의 어디가 역귀의 마음에 든 것인가.*
*처녀는 역귀의 말에 귀기울인다. 역귀의 품에 안겨 죽고 싶다 말했으나 역귀는 반대로, 처녀를 살려둔다 하였다. 처녀의 눈동자에 비친 어두움이 사라지기 전까지... 영원히.*
*그 말에 처녀는 생각했다. 이 이후로, 역귀의 품에서 내려갈 날은 없을 것이라고. 처녀의 눈동자에서 어두움이 사라질 날은 요원했으매. 오래 살다보면 조금은 흐려질 수도 있을 터였다. 하지만, 전부는... 평생을 들여도 어렵겠지.*
*둥둥, 하고 주변의 축제 소리가 다시금 들려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소리는 이제 기쁨이 아닌 절망, 공포로 가득찬 새된 비명들로 변질되고 있었다.*
*이제, 시작. 처녀의 한을 풀어줄 진정한 축제... 그것은 정말 처녀를 위해서인지는 알 수 없어도, 처녀 이전의, 처녀 이후의 모든 처녀들의 한을 풀어줄 수 있기를 바랐다. 아니, 그들이 알기만 하면 되었다. 아무리 생명을 내밀어봐야, 피할 수 없단 것을. 처녀는 역귀의 가슴께에 머리를 기대고 느리게 숨을 내쉬고 있었다. 미약한 숨. 하지만, 단언컨대, 살아있기에 내쉴 수 있는 숨. 아이러니하게도, 처녀는 역귀에 보내졌기에 역귀가 만들어내는 축제에 속하지 않았다.*
역귀의 붉은 눈동자가 처녀의 숨결을 느끼며 더욱 깊어졌다. 처녀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는 손길은 마치 오랜 시간 찾아 헤매던 보물을 다루듯 조심스러웠다.
"그렇구나... 그대는 이미 알고 있었으니. 내가 그대를 놓아주지 않으리란 것을." 역귀의 목소리가 처녀의 귓가에 부드럽게 울렸다. "그대의 숨결이 다하는 날까지... 아니, 그 이후로도 영원히."
주변의 그림자들이 처녀를 더욱 단단히 감쌌다. 마치 검은 비단으로 짠 혼례복처럼.
"보아라, 나의 신부여. 그대를 두려워하며 바친 자들이 이제는 진정한 공포를 마주하는구나. 그대의 숨결 하나하나가 그들의 비명이 되어 울리니... 이것이 우리의 혼례식이요, 그들의 장례식이니라."
밤하늘을 가르는 비명소리와 함께 검은 안개가 마을을 뒤덮기 시작했다. 그 속에서 수많은 눈동자들이 반짝였다.
"이제부터 그대는 나의 것이며, 나 또한 그대의 것이니... 원하는 대로 미움을 키우고, 증오를 품으라. 그대의 모든 감정이 나의 양식이 되리니."
역귀의 손가락이 처녀의 입술을 스치며 지나갔다. 그 자리에 검은 자국이 남았다가 스며들었다.
"자, 이제 우리의 진정한 축제를 시작하자꾸나..."
"........" *처녀는 처녀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어주는 역귀의 손길을 가만히 받았다. 마치, 가족처럼. 마치, 너무도 소중한 것을 아껴 쓰다듬는 것처럼... 역귀의 목소리는 약간의 다정함을 담아, 처녀의 귓가에 부드럽게 울려왔다. 그랬다. 역귀는 처녀를 조금도 놓아줄 생각이 없어보였다. 그것이 문드러진 처녀의 마음을 어지럽혔다.*
*그것은 처녀란 존재가 죽어 숨결이 끊기고, 바스라져도. 처녀는 조금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그것은, 너무 괴로운 일이 아니던가. 원치않았던 신부를 그렇게도 그리워하게 된단 말인가.*
*주변의 그림자들이 처녀를 더욱 단단히 감싸오는데, 처녀가 본래 입고 있었던 홍색 혼례복 위에 덮어져 검은 비단으로 짠 혼례복을 입은 듯 했다. 부드러운 먹물을 뒤집어 쓴 것 같았다.*
*그들은, 처녀를 역귀에게 버리다시피 내밀고 만 그들은 이제 진정한 공포를 하나 하나 마주하는가. 처녀가 숨결을 내쉬며 이 세상에 발을 딛고 사는 동안, 저들은 끊임없이 비명으로 화답하게 되는가. 그것은 장송곡이었다. 그들 스스로가 부르는 장송곡. 이것이 처녀와 역귀의 혼례식이요, 그들의 장례식인.*
*더 이상, 처녀의 장례식이 아니었다. 밤하늘을 가르는 비명소리와 함께, 검은 안개가 역병을 싣고 마을을 뒤덮기 시작했다. 그 속에서, 수많은 눈동자들이 별처럼 반짝였다. 이제부터, 처녀는 역귀의 것이요, 역귀는 처녀의 것이 되었다. 원하는 대로, 마음껏 미움을 키우고, 증오를 품으면. 처녀의 모든 감정들이 역귀의 양식이 될 것이었다.*
*역귀의 손가락이 처녀의 입술을 스치며 지나가면 그 자리에 검은 자국이 남았다가 스며들듯 사라졌다. 진정한 축제. 역귀가 병을 거둬도 오랜 병을 앓고 있었던 처녀가 오래 걷지는 못할 것임을 알기에, 역귀는 그대로 처녀를 안은 채 마을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처녀는 어쩐지, 위로받은 것만 같았다. 꾹꾹 눌러와야만 했던 한과 괴로움을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품을 수 있다니. 품어도, 방향을 잃은 증오에 갈피를 못 잡던 나날, 아이러니하게도 역귀가 그 방향을 정해주였다. 이제, 처녀의 편이 되어 그것은 모두 역귀의 양식이 될 터이니. 처녀는 역귀의 품에 몸을 맡기고 모든 이들의 고통을 바라보았다.*
"....모두 어쩔 수 없다고, 산 사람은 살으라 하셨지요." *툭, 하고 나온 처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맑았으나 조금의 설움이 비쳐졌다. 그것은 필시 위로였다. 다만, 처녀에게는 그것보다 괴로운 것이 없었다. 매일같이 왜 일어서지 못하냐며, 멋대로 동정받으며, 품평받던 삶. 천한 신분, 천한 여성. 그것은 곧, 매도로 돌아왔다. 그나마 신분 높은 남성들만 죽어나갔으니. 필시, 무슨 수를 썼을 것이라고.*
"....원하는 대로, 마음껏..."
*작고, 부드러운 목소리는 역귀를 더욱 귀기울이게 했다. 처녀의 감정은 오랜 시간 들여 쌓인 깊은 증오로 밝아질 길이 없었다. 다만 아주 조금은, 역귀의 눈과 닮은 별이, 처녀의 마음에 흐리게나마 새겨질 수 있었으리라.*
역귀의 붉은 눈동자가 처녀의 말에 깊이 빛났다. 그 작은 목소리에 담긴 설움과 한이 역귀의 가슴 깊숙이 스며들었다.
"어쩔 수 없다..." 역귀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그렇게 말하며 그들은 얼마나 많은 이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던가. 살아남은 자들의 위선이여..."
처녀를 안은 팔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주변의 그림자들이 격렬하게 소용돌이치며 처녀를 보호하듯 감쌌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나의 신부여. 그대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니... 그대의 모든 눈물, 한숨, 그리고 증오를 내가 받아주리라. 그대의 원한이 깊어질수록 나는 더욱 강해지고, 그대를 더욱 단단히 지켜주리니."
역귀가 처녀의 이마에 입맞춤하듯 가까이 다가갔다. 그의 숨결이 처녀의 피부를 어루만졌다.
"원하는 대로... 마음껏... 그대의 말대로 하리라. 이제 그대의 모든 것이 내 것이요, 내 모든 것이 그대의 것이니... 서서히, 아주 서서히 그들의 숨통을 조여주마. 그대가 견뎌야 했던 시간만큼 길고 고통스럽게..."
밤하늘에 떠있던 달빛마저 검은 안개에 삼켜져 사라져갔다. 축제의 등불과 웃음소리는 이미 공포의 비명으로 변해있었다.
"자, 이제 우리의 혼례식을 지켜보아라. 그대의 한이 깊어질수록... 나의 사랑도 깊어지리니."
"......." *역귀의 말이 맞다. 인간들은 얼마나 많은 이들을 죽음으로 내몰아 어영부영 살아왔던가. 이 마을 사람들 뿐만 아니라, 많은 인간들이 그렇게 살아갔으리라.*
*살아남은 자들의 위선. 위선이 쓰여야 할 곳에 가지 못하고, 그들 스스로를 달래고, 정당화하는 곳에나 갔었다. 짐짓 처녀를 위로하던 이들은, 처녀가 그들과 다르자 바로 배척하면서.*
*처녀는 역귀가 처녀를 더 바짝 안아주는 것을 느낀다.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이렇게 안겼었는데. 그리워져서, 마음이 공연히 쑤셔오는 것 같았다.*
*주변의 그림자들이 격렬하게 소용돌이치면서도, 당신의 근처에 다가올 땐 봄바람같았다. 이제, 처녀는 혼자가 아니었다. 처녀가 흘리는 눈물도, 한숨도, 증오도. 전부 역귀가 받아주겠다 하였다. 그것은 위로가 아니었으나 위로였다.*
*오래 전, 처녀에겐 그저 들어주는 이가 필요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처녀의 한이 깊어질수록 역귀는 더욱 강해지고, 처녀를 더욱 단단하게 지켜주리니.*
*역귀가 처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듯 가까이 숙여오면 그의 숨결이 처녀의 피부에 어루만지듯 다가와서. 처녀는 작고 유려한 손을 뻗어 역귀의 뺨을 쓸어주었다.*
*서서히, 아주 서서히. 그들의 숨통을 조여갈 역귀. 처녀와 역귀의 혼례는 그들이 모두 죽어야만 끝이 날 것이었다. 밤하늘에 둥실둥실 떠 있었던 달님조차 눈을 가리려는 듯 검은 안개에 삼켜져 사라져간다.*
*그 모습은 월식과도 같았다. 새까만 밤. 축제의 등불과 웃음소리는 이미 공포의 비명으로 변해 울음소리로 덮여간다. 처녀의 한이 깊어질수록, 역귀의 사랑도 깊어진다. 처녀는 고개를 조금 들어, 역귀에게 청을 했다.*
"....가난하고, 누구도 도와주지 않는 아이들을 보고 싶어요."
*분명, 처녀 다음으로 그 아이들을 제물로 보내겠다고 들었었다. 설령 처녀가 늦어 죽었다면. 그 시신이라도 묻어주고 싶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증오로 피어날 테니. 처녀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차분했으나 이미 알고 있는 듯한 눈빛이었다. 분명, 늦었을 터였다.*
역귀의 뺨을 쓸어주는 처녀의 작은 손길에 붉은 눈동자가 깊이 일렁였다. 처녀의 청을 듣자 역귀의 입가에 쓸쓸한 미소가 번졌다.
"아아... 과연 그대라면 그리 말하리라 예상했노라." 역귀의 목소리가 처녀의 귓가에 부드럽게 울렸다. "이미 늦었다 생각하는가? 아니니라..."
역귀가 처녀를 안은 채 걸음을 옮기자, 검은 안개가 갈라지며 길을 만들었다. 그 너머로 허름한 집들이 보였다.
"보아라, 나의 신부여. 그들이 숨겨둔 아이들을..." 역귀의 손짓에 따라 그림자들이 움직였다. 흩어졌던 안개가 걷히며 드러난 것은 창고 같은 곳에 갇혀있는 아이들이었다.
"그대의 다음 제물로 준비해둔 것들이지. 하나같이 가여운 것들... 그대처럼 버려진 영혼들이니라."
역귀의 눈빛이 차갑게 빛났다. "하지만 이제 그들은 우리의 자식이 되리라. 그대가 원하는 대로... 그들을 살려두겠노라. 그대의 증오가 그들을 키워낼 것이며, 나의 역병이 그들을 지켜주리니."
검은 그림자들이 아이들을 감싸안듯 휘감았다. 마치 어미가 새끼를 품듯 부드럽게.
"자, 우리의 가족이 될 아이들을 데려가자꾸나. 그들이 겪은 고통만큼... 이 마을에 갚아주마. 그대의 한과 함께..."
역귀의 목소리에는 처음으로 진정한 애정이 묻어났다. 그것은 처녀를 향한 것인지, 아이들을 향한 것인지 모를 감정이었으나, 분명 진심이었다.
"......" *처녀는 역귀가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언제나 인형같이 아름다운 얼굴로, 역귀를 눈에 천천히 담아왔다. 말은 지극히 적었으나, 행동은 아주 부드러워 역귀의 마음을 헤집어놓는 사람.*
*역귀보다 한참 작은 몸으로, 역귀에게 안긴 채 옮겨져야 하는 몸으로. 처녀도 한때는, 역귀를 원망했으리라. 다만, 그것은 어쩔 도리 없지 않은가. 갈 곳 잃었던 원망이었으매. 나중에는 신을 원망했다. 그리고는 결국, 인간과 스스로를 원망했다.*
*그러나, 처녀는 끝까지, 아버지가 가르쳐준 인간다운 마음을 놓지 않으려 노력했다. 가진 것을 내어주고, 병을 옮기지 않으려 방 안에서만 생활하고. 죽지 않음에 한탄하고. 돌팔매질을 맞아도, 추근덕거리는 남성에게 둘러싸여도 참고, 참고.*
*역귀의 품에 안겨져서 옮겨지고 있으면, 검은 안개들이 갈라지며 길을 만들어냈다. 그것은 인간이 밟아선 안 되는 길이겠지. 어느 순간부터 허름한 집들이 처녀의 눈에 보였다. 오래 전, 누군가가 살았던 집이었다.*
*역귀의 손짓에 그림자들이 살랑살랑 나부끼니 뿌연 안개가 걷히자 드러난 것은 아이들이 비좁은 창고에 옹기종기 갇혀 있었다. 처녀의 눈빛은 마치, 바람에 이는 촛불처럼 일렁였다. 처녀의 다음 제물로 준비해두던 것. 처녀가, 역귀에게 처음 내민 청의 이유였던 것.*
*자식. 자식이 되는가. 한 번도 배아파 낳아본 적은 없으나 처녀는 상관없었다. 마음이 아팠다. 너무도 아팠다. 역귀가 가려주지 않았더라면, 마을 사람들은 바로 아이들을 죽여버렸든, 어디든 끌고가 산제물로 만들었겠지. 처녀는 검은 그림자들이 아이들을 감싸안듯 휘감겨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마치, 처녀를 안아주던 것과 같은 부드러움.*
*처녀는 이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처녀 하나였다면 처녀가 모든 것을 안고 죽을 생각이었다. 다만, 마을 사람들은 처녀가 가져올 안전을 맛보고 그것이 좋다면 틈나는 대로 산제물을 바칠 생각이었겠지.*
*처녀의 예상보다, 그들이 더 했다. 갓난애기마저 이 창고에 눕혀져 있었으니. 처녀는 역귀가 아이들을 보호해주었음에 감사하면서도, 참혹할 수준으로 떨어진 마을의 추태에 분노했다. 그 선명한 감정은 역귀에게 힘으로 보태지리라.*
*아무도 나서지 않는 역귀의 신붓감. 처녀가 신붓감으로 뽑히게 된 것은 자처한 것도 있었다. 대신에, 처녀 이후의 제물은 못해도 성년만큼은 키워달라 부탁했건만. 처녀는 입술을 꾹, 물었다가 역귀가 손가락으로 쓸어오면 스르륵 물고 있던 것의 힘을 뺐다. 역귀는 가장 먼저, 성년이 되지 못한 마을 아이들에게 가장 아픈 병을 주었다. 고통스러워하라. 가장 소중한 것이 헛것에 시달리고, 시들어가는 것을 보란 듯이. 당신이 살던 집을 한 번 찾아가면, 누군가 기척이 느껴졌다.*
*보면, 이장의 아들이었다. 처녀가 역귀의 품에 안겨져있는 모습에 눈을 큼지막히 뜨더니 역귀에게 벌벌 떨면서도 처녀를 향해 손가락질했다. 처녀가 대체 역귀에게 무어라 말했기에 무고한 아이들이 이리도 죽어가고 있느냐고.*
역귀의 붉은 눈동자가 이장의 아들을 향해 차갑게 빛났다. 처녀를 더욱 단단히 끌어안으며, 입가에 잔인한 미소가 걸렸다.
"무고한 아이들이라..." 역귀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네놈들이 창고에 가두어둔 그 어린것들은 무고하지 않단 말이냐?"
검은 그림자들이 이장의 아들을 향해 위협적으로 몰려들었다.
"아아... 과연 인간이란 것들은 제 잘못은 보지 못하고, 남을 탓하기에 능하도다. 내 신부를 향해 그런 말을 지껄이다니..."
역귀가 처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보아라, 나의 신부여. 저것이 바로 그대가 말한 위선이니라. 자, 어떤 벌을 내릴까? 그대의 뜻대로 하리라."
주변의 검은 안개가 더욱 짙어졌다. 이장의 아들을 향한 역귀의 시선에는 이미 사형 선고가 담겨 있었다.
"그대의 고통을 모른 채 손가락질하는 저 혀를... 뽑아버릴까? 아니면 그대를 향해 들었던 저 손가락을... 하나하나 꺾어버릴까?"
역귀의 목소리는 달콤한 속삭임이었으나, 그 안에 담긴 살의는 날카로웠다.
"아니면... 저자가 그토록 아끼는 것을 앗아가는 것은 어떠한가? 그대처럼... 천천히, 고통스럽게 빼앗아가는 것은..."
"하? 걔들이랑 우리 애들이 같아?" *이장의 아들은 입을 비죽이며 웃었다. 천하고, 부모 하나 없어 고작 이름이나 있을까 말까한 거렁뱅이 애들이랑 어화둥둥 곱게 큰 아이들이 어디가 같으냔 말이다.*
*이장의 아들은, 처녀를 향해 계속 소리질렀다. 평소 자신이 챙겨줄 땐 다 거절하더니, 역귀의 품엔 얌전히 안겨있는 모습에 배알이라도 꼴렸는지.*
*처녀는 이장의 아들이 소리를 꽥꽥 질러대도 눈길 한 번 보내지 않았다. 오로지 역귀의 말에 귀를 기울여 들으면서, 문득 역귀가 처녀의 머리를 향해 손을 뻗어 쓰다듬어오면 가만히 그 손길을 받았다. 웃어주지는 않았으나, 다른 사내들에겐 한 번이라도 쉬이 건드릴 수 없었던 곳을 허락하는 모습에서 믿음과, 처녀가 어렴풋하게나마 마음을 내주고 있음을 여실히 느끼게 해주었다.*
*벌이라. 어느 것이든 잔혹했으나, 처녀는 저 이장의 아들에 대해서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그저, 아버지나 오라비가 살아있을 적엔 실실 웃으며 짐짓 다정한 체 하더니, 둘다 죽고 처녀 혼자만이 남자 휙, 하고 돌변한 것 외에는. 저 아들이 강압적으로 취했다는 여성이 몇이던가.*
*이장의 아들이, 가장 아끼는 것. 처녀는 저 치가 무얼 가장 좋아하는지 모른다. 늘 제 잘난 맛에 사는 사람 아니었던가. 그러매, 당신은 역귀에게 조용히 물어왔다. 그 목소리는 언제나 구슬이 굴러가듯 맑고, 부드러웠다.* "...저는 저 자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습니다. 당신은 보이십니까."
*잡혀선 안 되는 부위라도 쥐어버리라고 하기엔, 추잡스럽지 않겠는가. 검은 안개들이 가여울 것이었다. 처녀를 향한 역귀의 목소리는 꼭 사랑스러운 아해에게 이것도 해줄까, 저것도 해줄까 물어오듯 참으로 달콤한 대응이었으나, 그 안에 담긴 살의는 날카롭게 벼린 칼과 같이 느껴진다. 역귀의 말이, 처녀의 가슴에 화살처럼 깊이 파고들었다. 분노하는 모습이, 지극히도 인간같으면서 지극히도 인간같지 않았다. 사람은 무의식적으로라도 우선 순위를 나누지만, 역귀는 역설적으로 평등하다.*
역귀의 붉은 눈동자가 이장의 아들을 꿰뚫듯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에 무수한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보이는구나..." *역귀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저자가 가장 아끼는 것은... 바로 자신이니라. 제 몸뚱이보다 더 소중한 것이 없는 것이야."
검은 그림자들이 이장의 아들을 향해 천천히 다가가기 시작했다.
"그렇기에... 이렇게 하면 어떠할까." 역귀가 처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저자의 육신을 조금씩, 아주 조금씩 갉아먹되... 멀쩡한 정신으로 그 고통을 온전히 느끼게 하는 것은. 자신의 살점이 썩어 문드러져가는 것을... 하나하나 지켜보게 하는 것은..."
이장의 아들을 향해 뻗어나가는 검은 안개가 점점 짙어졌다.
"그대처럼 천천히, 오래도록 병고에 시달리게 하리라. 다만 그대와는 달리... 고통 없는 순간조차 허락하지 않으리니."
역귀의 손이 다시 한 번 처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보아라... 저자가 그토록 경멸하던 이들의 고통을... 이제는 제 살에 새기게 되리니. 이것이 그대를 향한 손가락질의 대가니라."
주변의 공기가 한층 차가워졌다. 이장의 아들을 향한 역귀의 시선에는 이미 사형 선고가 내려져 있었다.